작성일 : 09-05-13 13:56
허남철 일본화전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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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철 일본화전

토포하우스 제 1전시실
2009. 6. 3 ~ 6. 16


석채(石彩)의 길을 가다

최은주 -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그림 그리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 사회적 맥락에서 살펴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화가가 명성을 얻은 후라면 평론가, 화상, 동료작가들이 그의 주위를 에워싸게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보통의 화가들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과 자신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고독감에 휩싸이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는 화가들은 무엇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일까? 허남철도 그런 작가의 한 사람이다. 스스로도 이야기하기를 여러 차례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려 했지만 다시금 붓을 잡고 묵묵히 화가의 길을 걸어왔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일본의 전통적인 석채 기법을 사용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식민지 시기, 일본유학을 통해 석채 기법을 수학한 김은호, 허건, 천경자, 박래현 등의 초기 작품에서 일본 석채화 기법이 수용된 것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이후 민족적 정서에 기인하여 한국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던 정통 일본 석채의 기법과 표현방식을 허남철은 구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걸어왔고 앞으로 걸어갈 길 역시 석채라고 서슴없이 이야기 하고 있다. 일본인 전문가 사이에서도 석채기법을 제대로 구사하려면 10년 정도가 걸린다는 것이 통설이다. 허남철은 한국에서 한국화를 전공했고 유학초기 한국화의 제작방식과 사뭇 다른 일본 석채방식이 낯설고 어려워 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여러

번 좌절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석채의 무겁고 튼튼한 질감이나 표현방식에 매료되었고, 이제는 이 기법을 사용해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일구어 나갈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그의 그림 중에서 가장 확실한 영역인 인물화들은 허남철의 작가로서의 태도를 드러내 보여준다. 그의 인물들은 대개가 정면을 향해 무엇인가를 직시하고 있다.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든,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치게 되는 청년이든 그들의 시선은 다른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누군가를 상대적으로 응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의 인물상들은 그림 그리는 화가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타자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작가의 분신으로 보인다. 화가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는 작가의 내면을 읽어낼 수 있다. 그래서인지 허남철의 인물상은 정말이지 소중하게 그려졌다는 느낌을 준다. 석채화가로서의 온갖 기량을 동원하여 작가는 인물의 생김새와 표정을 그려 내었고 그들의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의 부분 부분을 섬세하면서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배경에는 인물의 고귀함을 드러내려는 듯이 신비로운 식물들과 성스러운 동물들이 등장하고 있어 화면에 신비감을 더해 주고 있다.

최근의 인물화들과 비교해, 1994년 작인 <독백>을 들여다보면 이 작가가 어떻게 자신을 변화시켜 왔는지를 살펴 볼 수 있다. 작품의 제목처럼 한 인물이 마치 연극무대에 서 있는 듯이 포즈를 달리 하면서 독백을 하는 듯한 상황이 그림 속에서 연출되고 있다. 그런데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이다. 각기 다른 5개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동일한 한 인물은 분명 아래 부분의 무엇인가를 의식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림의 아래 부분에는 마치 죽은 자를 안치한 듯한 관형태의 직사각형 면이 있고 그 안에 나신의 인물이 뒷모습을 보인 채 옆으로 길게 누워 있다. 작가가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든지 간에 그 인물 역시 작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을 우리 모두는 짐작해 볼 수 있다. 화가로서의 삶에 대한 두려움이 누워 있는 인물로 상징되어 있는 것이다. 화가로서의 삶을 택한 작가 자신의 독백이 청년기 이 작품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화면의 상하를 가로지르는 어두운 나무숲과 그 뒤로 펼쳐지고 있는 구름 낀 하늘의 대비 역시 청년작가의 불안한 내면을 드러낸다.

<독백>이후 제작된 <바다의 동산>은 석채기법을 어느 정도 습득하여 본격적인 작업 구상이 가능해 진 시점에 제작된 것으로서 얼굴을 살짝 옆으로 돌린 소녀의 주변으로 바다 풍경을 전개시킨 작품이다. 물고기와 해초가 부유하는 어두운 심연의 바다가 주요 배경인 이 작품은 일종의 환상경이다. 이 그림 속에서 바다는 바다 속 풍경뿐만 아니라 바다 위 풍경까지를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수면 위에 떠오른 황금색 달은 운행의 시간성을 그대로 전개시켜, 공간성과 시간성을 한 화면에서 담아내고자 한 작가의 의욕을 읽을 수 있다. 소녀의 왼쪽 어깨위로 역전의 위상을 보여주는 소년의 존재와 소녀의 허리 뒤에 어둡게 그려진 나신의 여인 뒷모습 역시 이 그림의 환상성을 배가시킨다. 바다와 소녀의 소재는 이후 몇 년간 더 지속되었다.

2004년 이후 작가의 시선은 보다 현실적인 인물들에게로 옮겨진다. 꽃밭 속에서 머리를 매만지는 소녀, 유행하는 머리 모양과 옷을 입은 소년, 핸드백을 가볍게 어깨에 둘러 맨 원색적인 의상을 입은 여인 등이 작품에 등장하여 작가의 관심이 보다 일상적이고 친근한 것으로 변하였음을 보여준다.

인물화가 주종이지만 허남철 작업의 특징은 식물과 동물 소재의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30호 이하의 비교적 작은 사이즈를 지닌 이들 작품에서 작가는 장미나 석류, 새우, 물고기 같은 단일한 대상을 다루고 있다. 이들 작품에서는 석채의 다양한 기법이 등장하는데, 입자가 굵은 물감을 사용하여 요철을 드러냄으로써 화면의 질감을 보다 생생한 것으로 표현한다든지, 샌드페이퍼로 화면을 긁어 본다든지, 물로 씻어 내리는 등의 과감한 표현 기법을 살펴 볼 수 있다. 이밖에도 허남철은 먹과 호분, 금분과 은분, 금박과 은박, 입자가 고운 석채를 사용하는 보수적인 작품의 제작도 아울러 병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다소 생소한 석채 기법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석채 기법을 바탕으로 자신 작업의 내용과 형식을 충실히 전개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허남철의 작품은 주목할 만하다. 다양한 재료의 사용과 실험적 형식의 시도가 끊임없이 요구되는 현대 미술의 세계에서, 석채 기법의 예술적 활용이 그의 작업을 통해 어떻게 전개될지 상당히 기대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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