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9-06-17 10:47
토포하우스 초대전 <윤여걸 목판화전>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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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그늘에서 찾은 生의 알리바이

1. 인사동, 명동, 신촌, 천안에서 사람도, 나무도, 건물도 모두 현란한 대기의 양광으로 산산이 부서져 필선과 칼 맛으로 환원된다. <00시 00분 인사동에서> 등의 기계적인 제목처럼 작가가 거니는 장소에서의 그냥 그렇게 포착된 순간적 풍경들과 멈춰진 시간들. 찰나, 눈 깜짝할 사이 등의 어휘로나 표현 가능한 그런 한 호흡밖에 되지 않는 순간의 풍경. 스냅사진을 옮긴 것처럼, 내면이나 서정을 배제한 일상에 대한 건조한 시선과 자연주의적 묘사.

이 파편적인 필선들의 끊임없는 변주와 반복으로 화면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모두 유사한 단위구조로 구성된다. 마치 세계를 구성하는 입자들(빛을 전달하는 전해질인 에테르나,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단위인 ‘쿼크’나 ‘초끈’ 이론과 같은)과 시공간을 드러내듯이 이 필선들은 그렇게 반복적으로 요동치며 화면을 구성한다. 거기에 두텁게 릴리프(Relief)된 한지의 부드러운 물성이 포개어져서 중성적이기만 했던 소재들에 부드러운 숨통을 열어준다.

스냅사진과 같은 시선과 구성방식을 전면에 등장시킨 건 앞에서 거론한 이유와 더불어 일상성에 접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여기에선 이전 윤여걸의 작업들에서 농후하게 보였던 심리적 요소(삶/죽음, 허무/의지 등)들이 사라진 자리에, 감정을 배제한-그러면서도 적당히 거리두기 상태의-관찰자적인 시점이 도드라진다. 과거의 작업에서 일탈하려는 내용과 형식에 대한 도전과, 한편으로는 세계와 자신을 들여다보고 드러내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인식의 전환의 필요성도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관념적 주제에서 이탈할 수 있는 소재로 구체적인 일상은 매우 유효한 지점이 될 것이기에 초보적인 바라보기(와 그리기)를 선택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섞임엔 어떤 불편함이 있다. 작가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소거하면서도, 묘하게 관객의 감정을 건드리는 방식이 불러일으키는 소통의 교란이나 모호함 때문인 듯하다. 또한 이런 개념적인 측면에서의 작가의 의도와, 지루하고 고된 육체적 노동이라는 전통적 목판화형식과의 어울리지 않는 상대적 간극이 빚는 마찰도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문제를 설정한다. 일상이란 소재, 스쳐 지나가듯 우연한 만남들에 대한 정서적 무관심과, 그 소재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무표정하게 탈각하고 소거해 버리면서 역설적으로 이끌어낸 목판화의 시각적·촉각적 쾌감과의 이율배반적 공존이 그렇다.

그래서인지 여기에서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독특한 결과가 감지된다. 삶과 미술에 대한 작가의 가파르고 불편한 인식, 통념적으로 세계를 보거나 사는 방식을 거부하는 체질로 인해 자연주의적인(그리고 일반적인) 화면구축의 배후에서 풍겨나는 묘한 반어적 느낌, 혹은 주관적인 표현의 속성, 시니컬한 태도…. 일상의 객관적인 묘사 뒤로 작가가 감추려 했던 어떤 냄새가 풍긴다는 것인데, 이는 그가 소재로 선택한 ‘일상’에 대한 그만의 ‘그늘’이라 하겠다. ‘일상의 그늘’에서의 어떤 편치 않은 느낌. 이런 지점에서 보자면 윤여걸의 근작에서 어떤 양면성 - 작가가 의도한 주제로의 방향과 체질적인 표현성과의 이중성 - 이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는 앞에서 거론했듯이, 근작에서 감정을 소거해 버리려는 개념적이고 냉정한 입장과 이미 그의 몸에 체득된 탁월한 표현기량과의 충돌이 야기한 즐거운 혼란(?) 때문인 듯싶다.

2. 윤여걸의 근작에 등장하는 장면과 내용은 작가의 일상과 우연하게 이루어지는 수많은 조우(遭遇)를 의미한다. 하루에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 다양한 만남들. 도시에서, 시골에서, 인공물, 자연물, 사람들과의…. 어떤 것은 의미가 있고, 어떤 것은 그저 그렇게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그런 만남조차도 작가의 삶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다. 우연히 마주치는 대상들과의 조우에서, 그 의미와 가치라는 판단을 넘어서서, 있는 그대로의 순간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에 담아두고 드러냄은 삶에 대한 반성적 사유의 단초이자 존재의 알리바이가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의미나 가치와는 상관없는 상태에서, 여전히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인식하는 능력이 고양되는 것이다. 생의 한 가운데 이 짧은 순간들마다 반성을 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늘 깨어있음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알리바이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아니, 이 부분 부분들을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기억 속에서 종합해서 좀 더 크게 통찰할 수 있다면, 그런 반복으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습관화·타성화 되어가는 삶과 일상을 반성할 수 있지 않을까? 일상에 대한 시각적 모더니티란 바로 이 과정들이 이루어져 가는 반복적인 구조나 기제에 대한 폭넓은 자각적·비판적 사유는 아닐까?

작가에게 작업이란 건 이런 것이라 여겨진다. 기억들에 부딪히기, 문제 제기하기, 투덜거리기, 불편하게 거슬러 가며 반항 혹은 저항하기, 허무하게 독백하기, 안락한 머무름보다는 늘 움직이기, 그런 자신에 대한 자부심(혹은 자괴감) 갖기, 그리고 이런 행위를 통한 반성으로 새로움을 찾고,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도구이자 언어로 예술을 선택한 것. 그것이 뻔한 상식이나 규범과는 다른 독자적인 감성과 생각의 체계라는 것은 물론 의심의 나위가 없다.

윤여걸은 앞의 기술에 부합하는 체질적인 ‘작가’다. 선병질(腺病質)적인 예민함과 단단한 강골의 기질을 가진 채 삶과 작업에 대해 허무해 하고, 극복하려 하고, 거부하고 받아들이고…하는 다면적 속성이 내부에서 강하게 부딪히며 작업을 진행해 왔다. 그런 윤여걸이 이제 5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과거와는 또 다른 입장에서 작업을 시도하려 한다. 그의 작가로서의 출발점이었던 목판화가 일차적으로 고려의 대상이 되었다. 이번 전시는 그런 와중에서 자신과 자신이 다루는 매체에 대한 까칠한 비판적 태도를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그가 기존의 작업문법에서 환골(換骨)까지는 아니더라도 탈태(奪胎)과정중임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 나는 윤여걸의 판화작업이 그의 ‘염세성 알레르기’에 대한 기록이자 극복을 위한 임상보고라고 쓴 적이 있었는데, 이는 작업주제와 내용, 표현방식, 그리고 작업에 대한 그의 태도와의 통일감에서 기인한 분명한 결정점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의 애니메이션 작업에서도 이런 내용과 형식과 어법은 여전했다. 그런데 윤여걸은 이번엔 작업의 내용과 형식을 비틀어 버렸다. 새로운 시도인 셈이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작품의 조형적 성취도라는 표면적인 부분이 아니라-물론 이번 목판화 작업에서도 윤여걸은 예의 밀도 높은 표현기량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선택한 소재와 목판화 작업형식이 어울리게도 하면서도 비껴가게도 만든 작업에 대한 작가의 의도나 태도라는 개념적 부분이다. 현재의 작업이 작가의 결정된 입장이라 보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인데, 작가가 천착하는 궁극적인 주제의 문제인지 변화의 와중에서 형식과 어법의 실험을 시도한 것인지가 모호해서다. 결국 윤여걸의 다음 작업에서 이 의문은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 다음 개인전이 궁금해지고 기다려진다.

김진하 / 우리미술연구소 품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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