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07-08 11:09
권철 사진전 <이호테우> 2015. 7.8~14
 글쓴이 : 토포하우스
조회 : 5,951  

 





이호테우

<일본 에서 귀국한 다큐사진가 권철 의 제주100일 르포>

이호테우 해변은 제주시 북서부 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해수욕장으로, 예로부터 풍성한 어장을 형성하고 있는 명소로 손꼽히는 곳이다. 이곳에 개발의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2002년, 제주시는 이호1동 일대의 부지안에 대규모 이호 유원지를 만드는 이호랜드의 개발을 승인해주고 공유수면 매립공사까지 마쳤으나 2009년 돈이 없어 결국엔 중국분마그룹과 손을 잡게 된다. 2013년 중국분마이호랜드(주)는 원래의 대규모해양유원지 사업을 카지노로 변경하는 사업계획서를 제출했고, 이호해수욕장은 이제 중국 카지노가 지배하는 비극적인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이호테우에서 12세부터 물질을 시작해 70여년을 해녀로 살아오고 있는 해녀할머니가 있다. 바로 85세의 홍순화씨이다.

고백하자면, 실은 나는 제주토박이가 아니다. 그렇다고 제주도와 애잔한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다. 20년이란 긴 시간을 일본에서 보냈고,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어린 아들과 가족을 데리고 안전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서울상륙작전 전에 휴양으로 선택한 곳이 제주도였다.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의 이호테우는 우리 가족에게는 환상의 휴양지였다. 해녀할머니를 만난 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제주의 대자연을 만끽하며 이호테우해변가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풍경 대신 내 눈에 들어온건 사람 키보다 더 큰 자루를 메고 가는 할머니 가 보였다. 본능적으로 차를 세우고 할머니의 자루를 같이 들어 주게 되었고 한참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다보니 해녀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책에서만 보던 해녀를 이렇게 만나다니…물속에서 물질만 하는 줄로 알았던 해녀가 밖에 있는게 의아스럽기도 하고, 생각보다 연세가 있으셔서 흠짓 놀랬다. 이처럼 내가 제주에 온 그날부터 그리고 해녀와 조우한것도 운명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 자루를 들고 따라간 곳에서 해녀 회장(윤숙녀)님을 만나게 되었고, 이 곳이 해녀들의 아지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직업병이 발동했을까? 무작정 다시 찾아간 해녀 탈의장에는 물질 준비로 분주한 아침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에 카메라를 든 낯선 사람이라 그런지 모두들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물질하러 가는 시간에 이르자, 트럭 한대와 경운기가 도착했고 할머니들이 몸을 실었다. 이호테우 매립지를 돌아 소라양식장까지는 10여분 정도. 경운기에 동승한 나의 건너편에 아무말 없이 앉아 계시던 할머니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홍순화(85세), 이호해녀 중 최연장자 해녀이시다. 이렇게 할머니와의 첫 만남은 덜컹거리는 경운기 위에서 시작되었다.

이호테우 전체의 해녀는 대략 70명 정도이지만 2009년 이호테우 매립 전후로 실질적으로 물질을 하시는 분은 1/3정도로 줄었다고 한다. 해녀 탈의장이 있는 곳 바로 밑이 원래는 바다였고 탈의장에서 옷을 갈아 입은 즉시 바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호 해녀탈의장 앞에서부터 대규모 매립이 강행되면서 이들 해녀들은 바다와 양식장(매립후 만들어진곳)까지 한참을 걸어서 다녀야한다. 매립의 영향으로 천연 어장이 파괴되고 어획량도 급속히 감소한 것은 당연하다. 이제 몇년 뒤면 이 매립장에 큰 드림랜드가 들어서게 될 것이고 수많은 중국관관객들도 이곳 이호테우로 몰려들게 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홍순화 할머니는 1931년 이호동에서 10분 거리의 옆동네 내도동 출신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12세부터 물질을 하기 시작해 70여년을 해녀로 살아오고 있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해녀의 전설인셈이다. 22세에 이곳 이호동 출신의 남편과 결혼을 하고 3남 2녀의 자녀들이 있다. 남편은 해병대 출신으로 군복무를 마친후 순경으로 일을 했으나 직장을 관두고 술에 의지한 삶을 살다가 55세에 별세하고 만다. 할머니의 삶은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같다. 막내아들을 임신했을때 (당시31세)산달이 다가오는데도 물에 들어갔었고 물속에서 양수가 터져 바로 집으로 돌아와 출산을 하기도 했고 돈을 벌기 위해 몇 달씩 육지로 해녀 돈벌이를 하러가기도 했는데 강원도 최전방 부대 근처(동해안)에서 몇번이고 총격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하셨다. 1960년대 초반에는 직접 잡은 소라를 5개씩 꼬치에 끼워 제주공항 뒷편 미군 집장촌의 아가씨들에게 200원씩에 팔기도 하며 겨우 생활을 연명해왔다. 아침 일찍 물질을 시작해 많을 때는 5-6시간 물질을 하고 그날 잡은 어류는 10km정도 떨어진 동문재래시장까지 지게로 지고 2시간을 걸어 다니며 내다 팔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해녀의 삶 그 자체는 힘들고 고된 삶 그 자체였다. 이처럼 그들에게는 바다가 있었다. 삶을 유지하게 해주는 신성한 장소이자, 고달픈 삶을 지탱해주는 정신적인 동반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호테우의 어장은 몇년전 매립으로 인해 어획량이 현저히 감소했다. 그나마 양식으로 소라와 전복을 하고는 있지만 어촌계에서의 소비 물량이 확보되지 못하면 물질은 어렵게 된다. 그러나 몇 분 정도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물질을 한다. 물론 홍순화 할머니는 결석하는 법이 없는 우등생이다. 개인적으로 물질을 할때는 규칙상 소라, 전복 등을 수확할 수가 없다. 어떨 땐 3시간 물질을 해 겨우 문어 2마리 작은 고기 몇마리가 고작일 때가 많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보름(15일)과 그뭄(30일)을 기준으로 4-5일 정도는 해녀는 물질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현대화의 탓도 있겠지만 해녀도 고령화되어 가고 있다. 제주도의 해녀는 이제 한 지역의 문화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지만 그 문화는 자의든 타의든 외면적인 변화의 움직임으로 변모되어 가고있다.

어느날,
홍순화 할머니가 병원에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고보니 이틀에 한번 꼴로 무릎 주사와 물리치료를 받지 않으면 버텨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과농사를 짓고 오랫동안 무릎때문에 고생하신 나의 어머니의 병원에 따라가듯 나는 무심코 병원에 동행을 하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들었지만, 병원측으로부터 완강하게 거절당했다. 그때 할머니께서 이렇게 소리를 치셨다. “저 양반한테는 사진찍게 해주게마시. 저 사진찍는 삼촌은 물질하는 물 속에도 잠수복입고 따라 들어와 찍는데 병원에선들 못 찍겠소. 찍게 해주시게마시 선생…..”
그 말을 들은 간호사가 잠시 뒤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상냥한 미소를 띄우며 촬영을 허가해주었다.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할머니는 이미 나와 내 카메라가 해녀들의 삶에 들어오는 것을 흥쾌히 인정하고 계셨던 것이다. 처음에는 경계했던 할머니는 나의 카메라에 자신의 삶을 그대로 투영되길 바라듯, 그렇게 서스럼없이 나도 해녀의 삶에 녹아들었다.
전설의 해녀 홍순화 할머니와의 많은 대화 시간속에 아직까지 내 마음 한구석을 꽉 메우고 있는 한마디가 있다. “나는 물속에 들어갈 때가 제일 행복해”
제주에 살다보니 국제자유도시, 평화의 섬, 환경과 전통문화가 살아있는 제주라는 구호 및 문구를 자주 보게된다. 하지만 현실은, 극도로 치닫는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는 섬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호테우해변가에 더 많은 현대화의 드림타운과 밀려오는 거대한 자본의 파도속에서 오늘도 할머니의 숨비소리는 거칠기만 하다.


-작가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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